요즘 들어 ‘디지털 화폐’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들립니다. 특히 몇몇 지방자치단체가 자체적으로 지역 화폐를 디지털 형태로 발행하면서, 지역 경제를 살리고 지역 내 거래를 활성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한 기술 실험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존 법 제도와 충돌하는 부분이 많아지면서,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과연 지자체가 직접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법적 문제가 발생할까요?

1. 지역화폐, 그리고 ‘디지털 버전’의 등장
사실 지역화폐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닙니다. 코로나19 이후 정부와 지자체가 소상공인 지원책으로 종이 상품권이나 카드형 지역화폐를 내놓으면서 이미 우리 생활 속에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등장한 디지털 지역화폐는 한 단계 더 진화한 형태입니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거래 내역이 투명하게 기록되고, 중앙은행이나 시중은행을 거치지 않고도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유통된다는 점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시에서 디지털 화폐를 발행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주민이 지역 내 상점에서 결제하면, 그 거래 기록은 중앙 서버가 아니라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자동으로 저장됩니다. 이렇게 되면 거래 조작이나 부정 사용을 막을 수 있고, 행정 입장에서도 지원금이 실제 지역 상권에 쓰였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 지자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기, 전북, 제주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로 블록체인 기반 지역화폐 시범사업이 진행되었고, 일부는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법’입니다. 현행 법률상 ‘화폐 발행’은 국가 고유의 권한으로 되어 있고,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화폐 형태의 자산을 발행하는 것은 법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습니다.
2. 지자체가 화폐를 발행하면 생기는 법적 충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은행법과 지방재정법이 화폐 발행과 자금 운용의 기본 틀을 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은행만이 ‘법정통화’를 발행할 수 있고, 지방자치단체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보조금 형태의 지역상품권만 발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화폐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면, 이게 과연 단순한 상품권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화폐’일까요?
이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법적으로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자체가 블록체인 기반의 지역 화폐를 발행했을 때 중앙정부나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이건 사실상 제2의 화폐다”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통화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심하면 불법 발행으로 볼 여지도 생깁니다.
또한 개인정보보호법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거래 내역이 블록체인에 남기 때문에 투명성은 높지만, 완전한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소비 패턴이나 이동 경로가 노출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이 때문에 현재 정부와 지자체 사이에서는 이 제도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역화폐가 화폐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디지털화된 형태 자체가 이미 화폐의 속성을 가진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통화 주권’이라는 국가의 근본적인 권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지역경제 활성화 vs. 법적 안정성, 균형점은 어디에 있을까
디지털 지역화폐는 분명 지역 상권을 살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지역 내 소비가 늘어나고, 돈이 지역 안에서 돌면 자영업자들의 매출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특히 대형 플랫폼 중심의 경제 구조 속에서, 지방이 스스로 자생력을 가지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법적 안정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예산 운용의 투명성, 금융기관과의 관계, 세금 처리 문제 등이 정리되지 않으면 중앙정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몇몇 지자체에서는 중앙정부로부터 ‘법적 근거 부족’을 이유로 시범사업 승인을 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중요한 것은 ‘협력적 제도 정비’입니다. 지자체가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려면, 중앙정부와 한국은행이 기본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지방이 창의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역화폐를 화폐가 아닌 ‘디지털 지역포인트’로 명확히 구분하거나, 발행 한도와 사용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법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술 보안 검증과 개인정보 보호 조치를 의무화하면, 이용자 신뢰도 역시 높일 수 있습니다.
4. 앞으로의 과제
결국 디지털 지역화폐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입니다.
법이 기술보다 느리게 움직이다 보니,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법적 불확실성에 막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제도를 손볼 때입니다.
지자체가 스스로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되, 통화 정책의 기본 질서를 해치지 않는 절충점을 찾아야 합니다.
앞으로 디지털 화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지역 디지털화폐의 역할 구분도 필요할 것입니다.
지역화폐가 단순한 소비 촉진 수단을 넘어 지역경제 자립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으려면, 기술과 법이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디지털 화폐 기반의 지역경제 실험은 단순히 경제 정책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떤 경제 질서를 만들어갈지 시험하는 과정입니다. 지자체의 도전이 법의 벽에 막히지 않도록, 현실적이고 유연한 제도 설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