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년이 사라진 사회: 은퇴는 선택이 아닌 미룰 수밖에 없는 현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꿈꿉니다.” 이 문장은 한때 중년 이후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 선언처럼 들렸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이 말은 점점 더 현실을 외면한 낭만처럼 느껴집니다.
100세 시대가 현실화되면서 이제는 '은퇴 후 20년'이 아닌 '은퇴 후 40년'까지도 대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노후 준비에 그치지 않습니다. '경제적 이유'로 은퇴를 미루는 노년층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이는 일자리 시장 전반의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2024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평균 수명은 남성 80.9세, 여성 86.6세이며, 은퇴 연령은 평균 63세. 그 사이 약 20년 이상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고령화 사회는 이제 이미 지나갔고, 우리는 고령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래 사는 동안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죠.
과거에는 60세면 은퇴가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 이후의 삶은 연금, 자녀 지원, 저축으로 해결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연금만으로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고, 자녀 역시 부모 부양보다는 각자의 생계로 벅찬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노년층에게 "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해야만 하는"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 노년층의 일자리, 숫자보다 ‘질’의 문제
많은 지자체와 정부 기관은 고령자 일자리 창출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운영 중입니다. 경비, 환경미화, 공공근로 등 단순 업무 위주의 일자리가 그 중심인데, 이들은 대체로 임시직, 시간제, 저임금 중심입니다. 게다가 체력적 한계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상당한 육체적 노동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고령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죠.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질'입니다. 노년층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시간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경험과 기술을 살릴 수 있는 '존엄 있는 일'입니다. 은퇴 전까지 특정 분야에서 30년을 일했던 이들이 갑자기 정리된 후, 매뉴얼 위주의 단기 일자리로 넘어가는 구조는 사회 전체적으로 지식의 손실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65세 기술 엔지니어가 경비직으로 재취업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요? 고령 인력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중장년 기술 멘토링, 자문, 컨설팅 같은 새로운 일자리 구조가 아직은 희소합니다. 해외 선진국 일부에서는 은퇴자를 '산업 멘토'로 고용하는 구조를 제도화한 사례도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죠.
또한 여성 고령자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열악합니다. 가사와 육아로 경제활동 경력이 단절된 경우가 많아, 재취업 기회가 훨씬 적고, 제공되는 일자리의 선택지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성별, 경력 단절 여부에 따라 고령 일자리의 희소성과 불균형은 더욱 심화됩니다.
💼 은퇴 없는 사회, 새롭게 생각해야 할 일의 정의
‘정년이 사라진 사회’는 단순히 기업에서 퇴직 연령을 늘리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사회 전체가 '일'의 정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을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하지만, 사실 일은 한 개인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활동입니다.
고령자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은퇴 이후에도 일정한 역할과 소속감을 가질 수 있어야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활력이 유지됩니다. 실제로 ‘일을 계속하는 고령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증, 치매 발생률이 낮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결국 일은 단순한 생계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합니다. 첫째, 고령자 맞춤형 직무 개발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기존 일자리를 연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고령자의 역량과 건강 상태에 맞춘 직무 재설계가 필요합니다. 둘째, 기업도 고령 인력을 리스크가 아닌 자산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퇴직 후에도 계약직, 자문직 등의 형태로 전문성을 활용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하죠. 셋째, 정책 차원에서는 단기 알바 위주의 일자리보다 중장기 커리어형 일자리 중심으로 고령층 일자리 시장을 설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령층이 일자리를 구걸하는 구조’가 아닌, ‘사회가 그들의 가치를 존중하며 일자리를 설계하는 구조’로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선택의 여지 없이 일해야 하는 구조지만, 앞으로는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한 노년이 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 정년이 사라진 시대, 일자리의 정의도 바뀌어야 한다
고령화가 재앙이 될지, 축복이 될지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노년층의 일자리는 단순한 '복지 정책'의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년’을 기준으로 일과 삶을 구분해 왔지만, 이제는 정년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사회는 나이에 관계없이 일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일을 하는 노년’이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반적인 삶이 된 지금, 우리 사회는 늦기 전에 새로운 ‘일의 패러다임’을 설계해야 할 때입니다. 고령자에게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닌, 자존감을 지켜주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 100세 시대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것입니다.